종교 역사 상식 (중세편)

2020. 12. 7. 14:02상식 정보

종교 역사 상식 (중세 편)

오늘은 종교 역사 상식 중 중세 시대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서유럽의 교황

 서쪽 교회를 이끄는 교황을 생각해봅니다. 로마가 동서로 분열되었고 교회도 분열되었습니다. 게르만족의 공격으로 서쪽의 서로마가 멸망해 정치적 지도자는 사라진 상태에서 혼란스러운 상태였으나 종교적 지도자인 교황만은 건재했습니다. 동쪽의 로마는 비잔티움 제국으로 유지되고 있었으며, 황제가 종교적 영향력까지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정치적 권한과 종교적 권한 두 가지 모두를 가진 비잔티움 황제는 서쪽 로마의 교황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서쪽 교황은 비잔티움 황제의 간섭을 원하지 않았고, 둘의 갈등의 중심에는 성상 숭배 금지령이라는 쟁점이 존재하게 됩니다.

 원래의 크리스트교에서는 우상숭배를 금지합니다. 만약 신앙의 대상을 그림이나 조각으로 표현한 성상에 기도한다면 이는 우상숭배일까요? 초기에는 그렇다고 판단을 내려서 성상을 만드는 행위 자체도 금지되었다고 4세기 무렵에는 선교를 위한 명목으로 묵인되었습니다. 8세기 이후에는 비잔티움의 황제가 성상 숭배를 금지하고 성상 파괴령까지 내리게 됩니다. 황제가 원하는 것은 성상 숭배 금지를 통해 종교적, 정지척 입지를 높이고 결국엔 서쪽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의 교황은 게르만족에게 크리스트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성상이 꼭 필요했고 동시에 황제의 간섭도 받고 싶지 않았습니다.

 서쪽 지역의 정치적 공백기에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요. 서로마를 멸망에 이르게 한 게르만족에는 프랑크족, 고트족, 반달족, 앵글로 샌슨족 등 여러 종족이 속해있었습니다. 이들은 각각 오늘날 유럽지역에 많은 나라를 세웠고 가장 성공한 나라가 프랑크족입니다. 프랑크족의 성공요인으로 여러 가지가 꼽히지만 그중 하나는 바로 크리스트교로의 개종입니다.

 다른 부족과의 전쟁에 앞서 클로비스 왕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해 준다면 크리스트교로 개종하겠다'라고 기도했고, 전쟁에서 승리하자 왕은 약속을 지켜 아예 크리스트교를 국교로까지 삼았습니다. 프랑크 왕국은 개종 후 게르만족을 야만인이라고 무시하며 지배받기를 거부했던 로마인들의 반발까지 줄일 수 있었고 교회를 후원하고 교회 지식인들의 조언과 지원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교황의 입장에서는 비잔티움 황제보다 군사적, 정치적 권한이 부족하니 군사적으로 지지해줄 강력한 조력자가 필요했습니다. 프랑크왕국의 왕은 안정된 왕국을 유지하고 신으로부터 인정받아 안팎으로 정당성을 갖길 원했습니다. 이 두 명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8세기 프랑크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로 대관까지 받게 됩니다.

 이후 서유럽에서 교황과 황제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프랑크 왕국이 분열된 이후 지역은 이민족의 침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세속의 왕권은 강하지 않았고 지방분권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이와 다르게 교회는 유럽 사람들의 전체 삶을 장악해가며 영향력이 막강해졌고 교황권은 왕권을 위협하기도 하고 때로는 능가했습니다.

 황제와 교황권의 관계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는 카노사의 굴욕입니다. 신성로마 제국 왕과의 갈등에서 승리한 교황은 영국과 프랑스에서도 성직자 임명권을 요구했고 어느 정도의 권한을 받았습니다. 대신 왕은 성직자 임명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과 교황이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하는 권한을 가져왔습니다. 중세 유럽 내에서 교황 권한의 크기를 통해 크리스트교가 미친 영향력을 짐작 가능하게 합니다.

 11세기 어느 날, 교황에게 비잔티움 제국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사절단이 도착했습니다. 동쪽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공격당하고 있으니 도와달라는 전갈이었고 교황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로 느껴졌습니다. 예전에 우위에서 간섭하던 비잔티움 황제가 도움을 요청했을 뿐 아니라 이를 이용해 세력을 더 키울 수 있다면 서유럽의 황제들도 견제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교황은 성지인 예루살렘이 이교도인 이슬람교에 정복당했으니 성지를 되찾아야 한다며 유럽에 전역에 대규모의 군대를 모집했습니다. 군대를 모집할 때는 성전을 강조했고 설령 죽더라도 영혼은 천국에 갈 것이고 큰 보상이 따를 것이라며 선전했습니다. 싸우는 사람인 왕, 제추, 기사들만 전쟁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고 농민들과 상인 , 신의 계시를 받았다는 아이들까지 동쪽으로 향했습니다.

 1096년에 떠난 1차 십자군은 다음 해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했습니다. 1차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은 매우 참혹했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로 한 신전에서 죽은 사람이 1만 명이 넘어 바닥에 고인 피가 발목까지 찼다고 합니다. 이슬람 세력도 자신들의 성지이기도 한 예루살레믕ㄹ 되찾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공격했고 서쪽에서는 2차 십자군을 파견했습니다. 지금의 영국, 프랑스, 독일 지역의 왕들까지 전쟁에 참여했으나 모두 실패했고 이는 3차, 4차 십자군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성전으로 시작된 십자군은 4차부터 변질되었습니다. 4차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돈을 받고 같은 크리스트교 국가인 비잔티움 제국을 공격했습니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동쪽 지중해 무역권을 손에 넣기 위해 십자군을 이용한 것입니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더 이어진 십자군 원정은 계속 실패했으며 교황의 궐기로 시작된 십자군 원정의 실패는 교회 권위의 절대성에 심각한 손상을 입혔고 교황권은 약화되었습니다.

 십자군 원정 이후 유럽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게 됩니다. 유럽인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풍요롭고 세련된 문화를 가진 비잔티움과 이슬람 세계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유럽인들은 그리스의 철학, 아라비아 숫자, 제지술, 화약 등에 관심을 가졌고 그 후로 새로운 문물이 대거 유입되었고 유럽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옵니다.

이슬람

 유대교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종교는 유대교와 크리스트교뿐만 아니라 이슬람교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아내 2명이 있었습니다. 한 명은 사라이고 다른 한명은 사라의 이집트 출신 하녀 하갈이었습니다. 사라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는데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자 사라와 하갈의 사이는 나빠졌습니다. 어느 날 사라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사막으로 내쫓았고 이스마엘은 화가 나서 모래를 걷어찼습니다. 그곳에 샘물이 솟아나면서 사막의 오아시스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찾아와 샘 가까이에 사원을 세우고 대대로 물려받은 검은 돌을 올려놓았습니다. 이 신전이 이슬람 제1의 성지인 카바 신전입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돌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에서 쫓겨날 때 징표로 가지고 나온 돌이라고도 하니다. 카바 신전은 인도양과 홍해, 지중해를 연결하는 요지일 뿐만 아니라 동쪽으로는 페르시아, 서쪽으로는 인도를 잇는 교역의 중심지로 메카라고 합니다. 메카는 아라비아반도의 중요한 종교도시이자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로 성장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570년, 메가에서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무함마드라고 불렸는데 아버지는 무함마드가 갓난아기일 때 이미 죽었고 어머니 또한 6세가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 고아가 되었습니다. 무함마드를 키운 것은 할아버지였는데 할아버지마저 죽자 무함마드는 숙부의 밑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청년시절 그는 사막에서 양을 치는 목동이었습니다. 가난한 형편이었으나 사막에서 명상하며 사람들에게 믿음직하고 충실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20대 무함마드는 부유한 상인이며 미망인인 카디자의 일꾼으로 고용되었으며 40세였던 카디자는 무함마드의 인품에 반해 당시 25세인 무함마드와 결혼했고 그 후 15년간 자식을 낳아 기르며 잘 살 았습니다. 무함마드는 40세가 되던 해에 열병을 앓게 되어 아픈 몸을 이끌고 동굴에 들어가 명상과 기도를 했습니다. 동굴에서 수행하던 그에게 천사의 목소리가 들렸고 이렇게 610년 시작된 신의 계시는 632년 무함마드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이를 정리한 것이 이슬람교의 경전인 '코란'입니다. 신의 계시에 혼란해하는 그를 지지해주며 첫 번째 이슬람교 성도가 된 사람은 발리오 아내인 카디자였습니다.

 

메카에서 시작된 이슬람교의 전파의 과정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무함마드는 우상숭배를 금지하고 유일신 알라만을 숭배할 것과 부족단위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혈연을 뛰어넘어 알라를 믿는 공동체, 형제가 되자고 주장했습니다. 메카 사람들은 귀족들을 중심으로 그와 그의 종교를 거부하고 박해했습니다. 결국 무함마드는 622년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향했고 이 해가 이슬람교의 원년인 '헤지라'입니다. 메디나에서 세력을 얻은 이슬람교는 매우 빠르게 아라비아 반도로 전파되어 많은 아랍인들이 이슬람교로 개종했습니다. 630년 메카로 돌아온 무함마드는 카바신전에 있는 많은 우상을 부수고 이슬람교 신전을 세웠습니다. 이슬람교는 혈연보다는 공동체를 중시하며 평등을 강조했고 과부나 고아 같은 약자를 돌보는 것을 의무로 했기 때문에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호응을 받고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이후 무함마드가 죽고 장인인 아부 바르크가 무함마드의 뒤를 이어 초대 칼리프가 되었습니다.'칼리프는 아랍어로 뒤따르는 자로 이슬람 제국의 정치, 종교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중동 아시아의 거의 전 지역을 장악하며 빠르게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이렇게 순식간에 영토를 넓힐 수 있었던 이유는 개방적인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일정한 세금만 낸다면 이슬람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믿어라도 강요하지 않았고 같은 아랍인이 아니라도 이슬람교로 개종하면 세금을 면제하고 민족적인 차별도 하지 않았습니다.

 3대 칼리프인 우스만이 말년에 판단력이 흐려지자 정치적으로 잘못된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후 폭도들이 그를 살해했고 4대 칼리프는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스만의 사촌인 무아위야가 4대 칼리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따로 분파를 만들었고 갈등은 심화되었습니다.

 무아위야는 우마이야 가문의 사람으로 시리아의 총독이었고 그 지역에서 왕과 다름없는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알리를 견제하기 위해 자신의 지역으로 불러들였고 알리는 이에 맞서 막강한 군대를 이끌고 무아위야를 공격해 승리했다. 전쟁에서 진 무아위야는 화평을 요구했고 알리는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알리가 암살당하고 그 뒤를 이어 무아위야는 칼리프의 자리에 올랐으며 이후의 칼리프 자리는 무아이야 가문에서만 승계할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이슬람은 수니파와 시아파로 나뉩니다. 수니파의 '수니'는 예언자의 삶의 방식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며 우마이야 계열입니다. 시 아파은 '시야'는 알리의 당파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이들은 무함마드의 후손이 정통 계승자여야 한다고 여기고 있고, 이 둘의 갈등은 아직 계속되고 있습니다.

 

 

끝으로 포스팅을 마치며 중세시대의 종교 역사 상식에 대해서 알아봤습니다.

이외에도 재미있고 유용한 정보가 많이 있으니 둘러보시고 좋은 정보 얻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