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역사 상식 (영국)

2020. 12. 8. 02:54상식 정보

정치 역사 상식 (영국)

안녕하세요 오늘은 영국의 정치혁명 과정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영국혁명

 유럽에서는 근대 시민혁명으로 왕권이 제한되고 시민들의 권한은 법으로 보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서 일으킨 혁명으로 국가의 주인이 왕에서 시민으로 완전히 뒤바뀐 것입니다. 이런 급격한 변화가 시작된 곳은 영국이었고 17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일을 이해한다면 근대 시민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인 청교도혁명과 명예혁명은 산업보다 앞섰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죽었던 1603년의 영국은 절대왕정을 이끌며 중상주의 정책으로 영국 부흥의 기반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가 죽자 영국 왕실에서는 후계자를 찾아야 했습니다. 영국 왕실에서 찾은 후계자는 당시 스코틀랜드의 왕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의 할아버지인 헨리 7세는 자신의 딸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와 정략결혼을 시켰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위는 그들의 아들 제임스 5세가 이었고 그 뒤는 제임스 5세의 외동딸 메리가 이었습니다. 메리는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되었으나 반란이 일어나자 친척인 엘리자베스 1세의 영국으로 피신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새로운 왕은 메리의 아들, 제임스 6세가 되었습니다.

 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국의 종교를 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인 헨리 8세는 에스파냐 공주인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아들 후계자를 얻지 못하자 이혼을 원했습니다. 영국은 가톨릭 국가여서 이혼을 하려면 로마 교황의 허가가 필요했지만 로마 교황은 가톨릭 강국인 에스파냐의 눈치를 보느라 왕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헨리 8세는 영국의 국교회라는 종교를 따로 만들어 왕인 자신이 스스로 국교회의 수장이 되어 로마 교황으로부터 영국을 분리한 후 자신의 이혼을 수락했습니다. 왕이 다시 결혼한 사람은 캐서린의 시중을 들던 신교도인 앤이었습니다. 헨리 8세와 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엘리자베스 1세입니다. 그 후로도 헨리 8세는 4번의 결혼을 더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종교는 왕이 이끄는 영국 구교회와 전통의 가톨릭, 신교인 청교도 3개로 구분 됩니다. 정치를 주도하는 세력은 주로 영국 국교회나 가톨릭이었고 새롭게 등장하는 계급이었던 시민들 중에는 청교도를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 당시 시민들은 경제력을 갖추면서 점차 의회에 진출했습니다.

 헨리8세가 죽고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 1세가 왕이 되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여왕인 메리와는 이름만 같은 다른 메리입니다. 그녀는 '블러드 메리'라고 불리며 가톨릭의 부활을 꿈꾸었고 많은 청교도인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죽고 뒤를 이은 것은 청교도 신자였던 엘리자베스 1세였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종교 때문에 국가가 분열되는 것을 원하지않는다며 영국의 국교회로 개종했습니다.

 당시 영국내가톨릭 세력 중에는 엘리자베스 1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헨리 8세와 앤의 결혼이 정식 결혼이 아니니 엘리자베스 1세가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는 논리로 엘리자베스 1세를 거부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가 영국의 왕이 아니라면 다음으로 왕이 될 사람은 바로 스코틀랜드의 메리였습니다. 영국 내 상황이 이러한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영국으로 피신을 온 것입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를 곁에 두고 감시했고, 메리는 가톨릭 세력과 결탁해 엘리자베스 1세를 죽이고 스코틀랜드와 영국의 여왕이 될 계획을 여러 차례 세웠다고 합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메리가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왕족인 메리를 처형하지는 못했습니다.

 19년의 세월이 흘러 후계자가 없는 상황에서 엘리자베스 1세가 메리보다 먼저 죽는다면 영국에는 이전 메리 여왕때처럼 피바람이 닥칠지도 몰랐습니다. 불안해진 국교회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1세를 압박했고 결국 1587년, 스코틀랜드의 메리는 처형당합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엘리자베스 1세도 죽게 됩니다. 이제 영국은 왕은 누가 될까요? 가장 가까운 혈족은 처형당은 메리의 아들이자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였습니다. 그는 영국의 왕이 되었고 제임스 1세라고 불렸습니다. 제임스 1세의 종교는 스코틀랜드의 신교인 장로교였습니다. 그러나 영국이 왕이 되면서 영국 국교회로 개종했습니다. 제임스 1세의 선택에 구교와 신교 모두 반발했습니다. 구교에서는 1605년 가톨릭교도인 가이 포크스를 중심으로 영국의 상원실을 폭하려다 발각된 사건이 일어났고, 이 때문에 가톨릭은 왕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습니다. 신교 측에서는 신교를 믿는 사람이 왕이 되어 처음에는 기뻤지만, 그가 영국 국교로 개종하고 신교를 탄압하자 종교적 자유를 위해 영국을 떠나 신대륙으로 가는 메이플라워 호에 탑승하기도 했습니다.

 제임스 1세는 즉위 후 종교적 혼란과 함께 의회와도 갈등했습니다. 먼저 영국 의회의 특징을 알아야 갈등에대한 이해가 가능합니다. 십자군 전쟁 중이던 12세기 후반 당시 영국의 왕은 사자왕이라고 불린 유명한 리처드가 죽고, 그의 동생 존이 뒤를 잇습니다. 당시 영국은 재정이 고갈되고 물가가 오르고 빈부격차가 격심 해지는 등 내부적인 문제가 많았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존왕의 전쟁 패배로 실정이 어려움을 더했고 그가 소유하고 있던 프랑스 영지를 프랑스가 다시 뺏어가자 이를 찾기 위해 전쟁을 벌였지만 모두 패배했습니다. 안팎의 문제로 백성과 귀족들은 왕에 대한 불만이 극에 달했습니다. 결국 귀족들은 왕에게 왕의 권한을 제한하고 자신들을 보호해줄 문서인 마그나카르타를 만들어 서명을 강요합니다. 문서의 내용과 그 후의 전개과정을 보면 성공적이지, 시민들의 권한을 지켜준 것도 아니었으나 이로써 영국인들은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왕의 권한을 제한할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문서는 그 후 잠시 잊혔다가 17세기 영국 혁명기에 왕권이 관습법에 종속되었음을 주장하는 근거로 사용되었고 자유와 권리를 위한 투쟁의 상징이 됩니다.

 이에 하나의 역사적 경험이 더해지는 것이 바로 모범의회입니다. 13세기 후반 에드워드 1세는 전쟁을 위한 자금이 필요했고, 그래서 각 지역을 대표하는 귀족, 성직자, 시민들을 모아 모범 의회를 만들었습니다. 왕은 세금을 부담할 사람들을 모아놓고 미리 통보하면 징수가 쉬울 것으로 예상했던 것입니다. 초기 의회는 왕의 주도로 왕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모임이었습니다. 이후 1297년에는 중산층의 대표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따로 모임을 만들게 되는데 왕권에 대해 사람들의 의견을 모을 수 있는 의회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을 가진 영국에서 제임스 1세는 왕권은 신이 주었다는 왕권신수설을 옹호하며 절대왕정을 주장했습니다. 왕권을 과시하려는 왕때문에 이전보다 왕실의 재정지출은 8배가 늘었고 왕은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을 지원하기까지 했습니다. 필요한 재정은 관습적으로 영국 의회와의 관계를 고려해 조심스러워야 했지만 왕은 번번이 의회를 무시하고 자기의 뜻을 관철시켰습니다.

 1625년 제임스 1세가 죽고 그의 아들인 찰스 1세가 즉위했습니다. 그는 아버지 보다 더욱 강경하게 왕권신수설을 옹호했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프랑스 공주와 결혼했습니다. 당시 영국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크고 작은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고 더 많은 재정이 필요했던 찰스 1세는 의회를 소집합니다. 의회 소집은 왕의 권한이기 때문에 의회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고 의회는 왕이 원하는 증세에 앞서 '왕이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라는 권리청원을 내밀었습니다. 왕은 이 문서에 서명을 했으나 다음 해 의회가 관세 징수를 거부하자 의회를 11년간 소집하지 않고 소수의 측근만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세금을 부활시켜 새로운 새금으로 부과했습니다.

 영국 구교회 신자이자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찰스1세는 가톨릭에 가까운 영국 국교를 스코틀랜드에 강요했습니다. 신교도들이 중심인 스코틀랜드에 이런 강요는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고 1630년 찰스 1세는 전쟁자금을 위해 다시 의회를 소집합니다. 같은 해 11월 스코틀랜드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의회를 소집하고 찰스 1세는 의회에 대해 타협적인 태도로 그을의 의견을 수용했습니다.

 

정치 역사상식 영국 편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