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역사 상식 (불교,힌두교)

2020. 12. 6. 21:09상식 정보

종교 역사 상식 (불교, 힌두교, 유교)

안녕하세요 크리스트교에 이어서 불교와 힌두교 유교 등의 역사와 상식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힌두교

 인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종교 중 하나가 힌두교입니다. 힌두교는 다른 종교와 달리 창시한 신이나 경전 등이 확실하게 체계로 존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힌두교는 인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생활 방식 그 자체로, 힌두교를 이해하려면 인도의 역사를 알아야 합니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인더스 강을 따라 약 250여 개의 도시 유적으로 남아있습니다. 이곳에 산 사람들은 상하수도 시설과 도로와 같은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도시를 만들 정도로 문명이 발달했습니다. 그러던 기원전 1500년 경 ,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도시들은 쇠퇴했고 서북쪽에서 다른 종족인 아리아인이 대거로 이동해 왔습니다.

 원래 있던 주민보다 피부가 하얀 이들은 목축으로 생활하는 유목민이었습니다. 부족 단위로 생활했고 집단은 직업을 기준으로 무사, 사제, 평민 등으로 구분된 계급사회로 유지되었고 상하의 차별이 크게 존재하는 계급이라기보다는 직업의 구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인도로 들어와 정착하는 과정에서 선주민과 자신을 차별했고 계급의 상하 구분이 점차 뚜렷해져 갔습니다. 이 신분제도를 바르나라고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는 '색깔'을 의미합니다. 선주민과 이주민의 차별이 피부색으로 반영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리아인은 신의 명령에 따른 질서라며 최고계급으로 성직자인 브라만,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크샤트리아, 상인과 장인들로 구성된 바이샤, 노예와 노동자인 수드라로 사회를 구분했습니다. 계급 해 속하지도 못하는 이들은 '불가촉천민'이라 칭하며 천대했습니다.

 아리아인의 정착은 성공했습니다. 이들은 계속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했고 갠지스강 유역까지 여러 나라를 세웠습니다. 작은 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하던 기원전 1000년 무렵에 잦은 전쟁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왕의 권력은 점차 강해졌고 동시에 성직자인 브라만의 권위 또한 강회 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왕의 권한이 강화되면 성직자의 권한은 왕에게 흡수되거나(제정일치), 상대적으로 왕의 권한보다 축소되는 경향을 보입니다만 인도는 달랐습니다. 이유는 브라만들이 자신을 신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단순한 중재가 아니라 신을 움직이는 힘을 가진 존재로 규정해서 종교적 권위를 높이고 제사의식을 더욱 크고 복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며 미래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업에 관한 이야기와 윤회의 개념을 강조하며 바르나 제도를 더욱 공고하게 강화시켰습니다.

 브라만 중심으로 사회가 운영되면서 크샤트리아와 비이샤의 불만은 날이 갈수록 커졌고 개혁의 움직임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기원전 7세기 무렵 우파니샤드 철학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기존 브라만교의 교리를 거부하며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진리가 있으므로 브라만을 통하거나 그들의 제사의식을 하지 않더라도 누구든 명상과 사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때 등장한 종교가 바로 불교와 자이나교입니다.

 자이나교와 불교의 등장으로 옛것인 브라만교 자체가 인도인과 멀어지는듯했으나 브라만교는 사람들의 요구를 수용해 변화했습니다. 복잡한 제사와 제물을 간소화하고, 제물을 바치는 제사와 명상이나 고행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길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런 변화로 등장한 것이 힌두교입니다. 힌두의 어원을 살펴보면 인도의 문명이 시작된 인더스강인 산스크리트어인 '신두'에서 파생되었다고 합니다. 인도 또한 '신두'에서 파생되었고 어원이 같은 인도와 힌두교는 인도의 역사가 그대로 쌓여서 만들어진 이름 자체도 인도인의 종교를 의미합니다.

 추가로 기원전 7세기경 등장한 우파니샤드는 브라만교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등장했으니 브라만교를 부정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인도의 종교와 철학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베다의 완성을 우파니샤드라고 하는데, 브라만교에 대한 저항까지 흡수한 우파니샤드는 브라만교의 경전이자 인도인의 종교인 힌두교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힌두교의 가장 큰 특징은 포용력입니다. 불교의 석가모니 분만 아니라 다른 종교의 신, 각 지역의 토속신까지 모두 힌두의 신으로 흡수됩니다. 수많은 신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3명의 신이 있는데 우주를 창조한 브라마, 세상을 유지하는 비슈누,  파괴와 창조의 신인 시바입니다.

 우주를 창조하고 사라지는 브라마 신은 천지창조 외에는 큰 활약이 없어 인도인들의 관심을 크게 받지는 못합니다. 유지의 신 비슈누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면 물고기나 거북이 등으로 변해서 도움을 주는 존재로 부처도 비슈누의 화신으로 여겨집니다. 가장 인기 있는 신은 파괴와 창조의 신인 시바입니다. 용맹한 수행자로 상징되며 보라색 몸에 뱀을 감고 해골 머리 장식을 한 악마를 퇴치하는 용사로 주로 표현됩니다. 인도 문화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는 힌두교가 확산하자 브라만의 권위가 크게 강해졌고 현재의 삶보다 다음 생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신분제도에 대한 저항도 약화되었습니다. 각 바르나의 권리, 의무 , 생활규칙을 정리한 '마누 법전'이 만들어졌고 이 법전은 힌두교 도라면 지켜야 할 종교적 계율과 일상생활을 규제하는 강력한 규범으로 작용합니다. 힌두교는 인도 사람들의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과 그로 인해 표출되는 삶의 방식 그 자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불교

 힌두교가 등장하기 전인 기원전 600년대 인도에서 등장한 종교들 중 하나가 불교입니다. 불교를 만든 사람은 인도 북부 작은 왕국의 왕자였던 고타마 싯다르타입니다. 그는 스스로가 신이거나 신의 아들이 아니었고 인간 중에 깨달음을 얻은 자로 석가모니라는 이름은 석가족의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의미입니다.

 싯다르타의 탄생은 매우 신묘했습니다. 어머니인 마야부인은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50세에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게 됩니다. 출산이 다가와 친정집으로 이동하다가 산기를 느껴 보리수 아래에서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렇게 태어난 아이는 울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일어나 뚜벅뚜벅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외치고 첫울음을 터트렸습니다.

 싯다르타의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싯다르타는 이모의 손에서 부족함 없이 왕국의 후계자로서의 삶을 살며 16세에는 결혼도 하고 아들까지 낳았습니다. 그가 20대 후반 사냥에서 돌아오다 성 밖에서 병이 들어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시종에게 물으니, 시종은 모든 사람은 병이 든다고 답했습니다. 다음날에는 지팡이를 짚고도 잘 걷지 못하는 노인을 보고 그도 아픈 것이냐고 묻자, 시종은 노인은 아픈것이 아니라 늙었다고 대답하며 모든 사람은 늙어간다고 대답했습니다. 다음날에는 화장터로 향하는 장례행렬을 보게 됩니다. 싯다르타는 시종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자 시종은 모든 사람이 죽는 다고 답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겪는 질병과 노화, 죽음을 목격한 싯다르타는 즐거움은 덧없고 고통이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넷째 날 다시 시장에 간 싯다르타는 병들고 늙고 가난한 승려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은 매우 평온해 보였습니다. 왕궁으로 돌아온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삶의 고통이 인간의 욕망 때문이라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욕망에서 벗어나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29세에 출가합니다. 그 후 6년간 다른 수행자들이 하는 모든 고행을 따라 하다가 욕망을 극복하려는 자신의 의지 자체가 욕망이었고 고통임을 깨닫고 부처(깨달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탄생한 불교의 교리는 모든 사물은 변하며 모든 것은 인연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깨달아 중도의 길을 걸으면 열반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불교는 신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련을 통해 자신의 욕망에 대해 고요한 상태를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불교가 인도에서 가장 융성했던 시기는 기원전 261년, 마우리아 제국의 아소카왕 때입니다. 칼링가 전투는 마우리아 왕조가 인도의 최초 통일 왕조라는 이름을 얻기 위한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20만 명 이상의 사람이 죽은 후에야 통일을 완수한 아소카왕은 승리의 기쁨에 도취했던 그의 눈에 고통에 피 흘리며 신음하는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왕은 깊은 슬픔에 빠졌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후 왕의 통치는 완전히 달라져 불교의 법과 도덕심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백성들을 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펼쳤습니다. 또한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포교 사절을 국내외로 보내기도 했습니다.

 단순 아름답게만 보이는 이 이야기는 간단히 보면 통일의 과정에서는 강력한 군대를 통해 누구보다 잔인하게 제국을 일구었고, 제국이라는 울타리를 만든 후에는 불교라는 통치 이념으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펼쳐 안정도니 제국을 불교로서 유지한 것입니다.

 그 후 인도 내 불교의 유행은 3세기 중반 굽 타제 국 까지 이어집니다. 굽타왕조는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도 발달해 고유의 인도 문화가 크게 발달한, 인도 고전 문화가 완성된 시기였습니다. 이 무렵부터 인도에서는 불교보다 힌두교가 대중들의 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이후 불교는 동쪽의 다른 아시아 지역으로 전파되어 해당 지역의 요구를 반영하며 특성에 맞게 변화되어 자리 잡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