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 역사 상식 (미국독립혁명 - 프랑스혁명)

2020. 12. 8. 20:00상식 정보

혁명 역사 상식 (미국 독립혁명 - 프랑스혁명)

안녕하세요 혁명 역사 상식 미국독립혁명 내용 바로 이어나갑니다.

1773년에는 급진적인 성향을 지닌 식민지 사람들이 보스턴 항에 정박하고 있던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배 2척을, 인디언 분장을 하고 습격해 수백 개가 넘는 차 상자를 바다로 버려버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보스턴 차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이어지는 독립혁명의 발단을 제공했습니다. 영국은 보스턴 항을 봉쇄한 후 군대를 주둔시켰고 식민지 사람들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을 뿐 아니라 매사추세츠의 자치권을 정지하는 등 강압적인 해결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대책 마련을 위해 대륙회의를 열었습니다. 아직 식민지 사람대다수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민병대를 조직하고 전쟁에 대비하기도 했으나 온건파는 영국의 왕에게 식민지 사람들은 영국 사람이니 이전처럼 통치해줄 것을 청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충돌이 벌어집니다. 영국군은 콩코드에서 식민지의 민병대가 전투 준비를 위해 화약을 모으고 있었고, 렉싱턴에 그들의 지도자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성과 없이 보스턴으로 돌아오는 길에 민병대의 기습을 받게 됩니다. 이는 무력충돌오 이어졌고 사상자가 생겼습니다. 식민지 사람들은 2차 대륙회의를 열었습니다. 이 회의를 통해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위한 총사령관으로 조지 워싱턴이 임명되었고, 영국의 지속적인 강경 대응 입장이 알려지자 13개의 식민지는 각기 독립 정부를 세우고 독립을 선포했습니다. 이어 독립선언서가 만들어졌는데, 이는 독립을 위한 선전포고였습니다.

 독립전쟁은 쉽지 않았고 식민지 사람들에게 전쟁을 이끌 강력한 중앙 정부도 없는 상황에 군대도 정식 훈련을 받은 군인이 아니라 일반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초기 전투에서 계속 패했습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의 활약과 프랑스 등의 유럽의 지원을 받으며 승리의 경험을 쌓아나갔습니다.

 유럽은 왜 식민지를 지원했을까요. 유럽의 입장에서 이 전쟁은 역국 본국과 식민지 간의 내전으로 봤을겁니다. 점점 강력해져 유럽 최대 강국이 된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식민지를 지원는 것은 큰 틀에서 전략적인 이득이었습니다. 강력한 육군을 자랑하는 프랑스는 군대를 보냈고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차관을 제공했으며 러시아는 식민지에 우호적인 중립을 선언했습니다. 결국 식민지군과 유럽의 연합군은 1781년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의 항복을 받아냈고, 1783년 파리 회의를 통해 독립을 인정받아 13개의 식민지는 미국이라는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물음으로 돌아가보면 식민지였던 지역이 독립을 위해 전쟁을 벌였는데 독립전쟁이 아니라 독립혁명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독립 이후에 만들어진 정치체제 때문입니다. 새로운 국가 미국은 왕에 의한 통치가 아니라 평등하고 자유로운 시민들에 의해 운영되는 민주공화국이었습니다. 민주공화국의 탄생입니다.

 현재 우리는 일반적으로 민주주의가 우월한 체제라고 생각하지만 당시의 인식은 아니었스빈다. 산업화 이후 자본주의가 정착되며 다른 나라와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권력이 집 주오 디어 효율적으로 정책 결정을 할 수 있는 절대왕정이 오히려 우월한 체제로 인식되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정책의 효율성이라는 면만을 따진다면 타협적이면서 많은 시간을 들여 정책을 결정해야 하는 비합리적인 제도라고 당시는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유와 평등을 내세운 신생국 미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제도를 표방했고 그 후 세계 최강국이 되었스빈다. 20세기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제1,2차 세계대전 후 새롭게 탄생한 많은 국가가 선택한 정치체제는 민주공화국이었습니다. 역사적 흐름을 볼 때 미국의 독립혁명은 세계 최초 민주공화국의 탄생을 낳은 세계 정치사에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사건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독립전쟁을 독립혁명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프랑스혁명

혁명의 시기를 거쳐 유럽은 근대가 되었고 시민혁명은 근대 이후의 변화와 방향을 제시하는 큰 틀을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이끈 시민혁명의 대표로 꼽히는 것이 프랑스혁명입니다.

 절대왕정을 대표하는 루이 14세는 자신을 태양왕이라고 칭하며, "짐이 곧 국가다"라고 할 정도의 권력이었습니다.

 강력한 힘을 가진 루이 14세와 후계자들은 영토 국가로 재편되는 유럽의 세력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벌어지는 유럽 내 거의 모든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밖으로는 강력한 절대왕권으로 유럽을 주도하던 이 시기, 프랑스 내부에서도 구제도의 모순으로 불리는 갈등이 커지고 있었습니다. 왕은 잦은 전쟁과 체제 유지를 위한 많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이를 부담하는 사람들은 시민이었고 당시 시민들은 세금을 내는데도 정치적으로 어떤 권리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에 반해 전체 인구의 2%도 안 되는 성직자와 귀족들은 전국 토지의 1/10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세금도 내지 않고 정치적으로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잘 나가던 루이 14세 때에는 구제도의 모순이 크게 문제 되지 않았지만, 세월이 흘러 계속된 전쟁과 대외 정책의 실패로 왕실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루이 15세는 적자를 극복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국채를 발행했으나 구제도의 모순을 더욱 크게 자극할 뿐이었습니다. 1774년에 즉위한 루이 16세는 미국의 독립혁명을 지원했고 국가 재정은 더욱 어려워졌습니다. 1789년 왕은 결국 세금을 더 거두기 위해서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이 삼부회는 각 신분별 세 집단의 모임으로 1 신분은 성직자, 2 신분은 귀족, 3 신분 시민의 대표로 구성된 신분제 의회였습니다.

 영국의 역사와 달리 프랑스의 삼부회는 1302년 필리프 4세에 의해서 사제, 귀족, 평민들의 대표를 모아 놓고 협력을 요청하는 자문기관으로 출발했습니다. 자문기구이기 때문에 모든 권한은 왕에게 있었고 각 신분의 대표에게는 아무런 권한도 없었습니다. 17세기 초 어린 루이 13세를 대신해 섭정하던 왕의 어머니에 의해 삼부회가 열리기도 했으나 별다른 특이점은 없었고, 그 후 삼부회는 175년 동안 한 번도 소집된 적이 없었습니다.

 루이 16세는 세금 부과를 위한 자문을 구하기 위해서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를 소집했습니다.

 3 신분인 시민 대표들에게 세금 부담의 의무만 있고 정치적 권리는 없는 자신들의 불만을 쏟아낼 기회였습니다. 삼부회의 구성원들이 궁전에 모이자 1과 2 신분은 원래 하던 대로 3 신분의 세금 부담을 원했고 3 신분은 변화를 원했습니다. 3 신분이 바란 변화는 바로 투표 방식이었고 투표를 통해 결정된 의견은 왕에게 전달됩니다.

 기존의 방식은 신분별 투표였고 3신분이 원한 것은 머릿수 별 투표였습니다. 신분별로 투표한다면 신분별로 1;1:1 투표권이 있는 것입니다. 1과 2 신분은 같은 의견일 테니 2:1로 3신분에게 불리합니다. 그러나 머릿수로 투표하면 결과가 달라집니다. 1신분은 약290명, 2신분은 약 270명, 평민 대표는 580명이 넘었습니다. 한 사람이 표를 행사하는 오늘날과 같은 평등선거를 한다면 1,2신분과 3신분의 표는 약 560 대 580이 됩니다. 3신분은 1인 1표를 행사하는 평등한 머릿수별 투표방식을 요구했습니다.

 성직자와 귀족들은 이런 시민들을 베르사유 궁전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쫓겨난 시민대표들은 궁 내 테니스 코트에 모여 국민의회를 조직했고 새로운 헌법이 개정될 대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선언에 하급 성직자와 일부 귀족들도 동참했습니다. 이들의 기세에 놀란 루이 16세는 성직자와 귀족에게 국민의회에 참가할 것을 명했습니다.

 시민 대표들과 파리의 시민들은 새로운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들린 소문은 공포를 일으켰고 루이 16세가 국민의회와 시민들을 탄압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의 용병을 불렀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시민들에게는 싸울 무기와 화약이 필요했습니다. 무기는 구했으나 화약이 부족했던 시민들에게 바스티유 감옥에 화약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바스티유 감옥은 원래 군사적 요새였으나 절대왕정 시기에는 정치범을 가뒀던 곳이었습니다. 절대왕정에 저항하는 시민에게 상징적인 곳이었습니다. 시민들은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고, 프랑스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시민의 지지로 힘을 얻은 국민의회는 8월 4일 봉건제를 폐지해 구제도의 모순을 제도적으로 극복하려 했었고, 8월 26일에는 인권선언을 발표해 혁명의 기본정신으로 삼았습니다. 이 선언으로 주권은 국민의 것임이 선포되었습니다. 루이 16세는 인권선언을 승인하지 않고 버티다가 굶주린 파리의 여성들이 빵을 달라며 파리에서 베르사유까지 약 20km를 행진할 후 궁 앞에서 시위를 벌이자 인권선언에 결국 동의했습니다. 이후 국민의회와 왕은 파리로 옮겨지고 혁명의 첫 장이 시작된 것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편 프랑스혁명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