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8. 21:07ㆍ상식 정보
혁명 역사 상식 (프랑스혁명)
안녕하세요 프랑스혁명 계속 이어나가겠습니다.
국민의회의 과제는 혁명의 원인이기도 했었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새로운 프랑스의 정치형태를 헌법으로 정하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재정문제는 혁명으로 사회가 혼란해져 더욱 심각해졌고 세금을 걷기도 어려웠습니다. 국민의회는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고, 이로 인해 교회가 지배했던 신 중심의 시기인 중세와의 결별은 공식화되었습니다. 이제 가장 큰 과제는 어떤 정치형태가 당시의 프랑스에 적합할지의 문제였습니다. 영국과 같은 입헌군주제나 미국의 공화제 중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국민의회는 혁명의 속도를 빨리하자는 공화제를 주장하는 급진세력과 입헌군주제로의 온건한 변화를 실현하려는 다수의 세력으로 나뉘었습니다. 급변하는 상황에서 루이 16세는 불안했습니다. 성난 군중들의 모습을 본 루이 16세에게 100여 년 전 시민들에 의해 처형당한 영국의 찰스 1세가 떠오르지는 않았을까요? 결국 루이 16세는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고향 오스트리아로 망명하기 위해 하인으로 변장한 채 새벽에 마차를 타고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왕과 가족들은 바렌에서 시민들에게 잡혔고 다시 파리로 송환되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왕당파보다 공화정을 주장하는 공화파가 크게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혼란 속에 1791년, 왕의 지위를 관료로 규정하고 의회의 구성과 임기에 따른 선거권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헌법이 제정되었습니다. 첫 번째 헌법이었고 이 법으로 임시 의회였던 국민의회는 해산되었고 프랑스 최초의 근대적 의회인 입법의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모든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주변국들의 왕은 프랑스에서 일어나는 일이 남일 같지 않았습니다. 혁명의 영향이 자국으로 퍼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변국의 염려는 역으로 프랑스인들에게 혁명 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언제든지 외국군, 특히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로 진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다가왔습니다. 1792년 내각 구성이 끝나자마자 혁명세력은 루이 16세로 하여금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하게 했고 혁명전쟁은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는 안으로는 혁명을 밖으로는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급진적인 자코뱅 파는 이 전쟁을 통해서 외국의 간섭을 막고, 왕과 왕당파 세력의 힘을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전쟁에서 계속 패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연합군은 루이 16세를 구출하고 혁명을 끝장내려 했습니다. 자코뱅은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국민들에게 국가의 주인으로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에 나서 줄 것을 호소했고 전국에서 의용군들이 모였습니다. 왕당파와 루이 16세가 오스트리아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소문이 돌아서 파리 민중들은 왕궁으로 진격해서 친위병을 살해하고 왕을 체포해서 왕권의 정지를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1792년 9월, 자코뱅은 왕권 정지가 아니라 왕권 폐지를 결정했고 비로소 공화정 수립을 선언했습니다.
입법의회 대신 국민공회가 만들어지고 헌법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공화정이 되었으니 왕이 더는 필요 없었습니다.
좀 더 온건하고 부르주아 세력을 대변했던 지롱드 파는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했지만, 민중과 시민들의 대변하는 급진적인 자코뱅 파는 루이 16세의 처형을 찬성했습니다.
1793년 1월, 자코뱅파가 지롱드 파를 근소한 차이로 이기고 루이 16세 부부의 처형이 결정되었고 실행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영국 , 네덜란드, 에스파냐 등이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습니다. 유럽의 국가들과 전쟁을 하면서 동시에 국민공회의 대표로 혁명을 주도해야 했던 사람은 바로 로베스피에르였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안팎으로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공포정치를 실시했습니다. 그들은 공안 위 우언회를 조직해서 혁명에 반대하는 왕당파나 온건한 성향인 지롱드 파까지 잡아서 반혁명 세력으로 몰아 처형하기 시작했고 1년 동안 약 2만 명정도의 사람을 처형했다고 합니다. 공포정치에 신물을 느끼는 이들이 늘어가면서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은 남은 반대파들을 숙청하기 위해서 의원들을 모아놓고 연설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연설이 시작되자마자 그동안 억눌렸던 공포정치에 대한 반발이 터져 나왔습니다. 위원들의 반대 발언은 걷잡을 수 없었고 발언 기회도 얻지 못한 로베스피에르 세력은 그날 밤 습격을 당해 바로 다음날 재판을 받았습니다. 변론할 기회조차 없이 오전에 재판 절차가 끝났고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18명은 광장으로 끌려나가 단두대에 올려졌고 국민공회는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죽고 자코뱅 파는 순식간에 몰락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권력은 온건한 세력에게 넘어갔습니다. 공화제를 유지했으나 로베스피에르 시기에 만들어졌던 모든 법이 폐지되었고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는데. 그 법은 5명의 총재를 두어 권력을 분담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헌법에 따라 총재정부가 구성되었는데, 총재 5명은 매우 무능했고, 급진파와 온건파 모두에게 비난받았습니다. 그러나 군대의 도움으로 국내 반대세력을 진압하고 국외로는 혁명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총재정부에 도움을 준 군인 세력은 나폴레옹이었습니다. 혁명전쟁에서 소극적인 방어만 하던 프랑스가 나폴레옹이 등장하자 적극적으로 다른 지역을 침략하는 전환을 맞이했으며 거의 모든 전쟁에서 승리했고 나폴레옹의 인기는 점점 높아졌습니다. 총재정부는 나폴레옹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집트에 나폴레옹을 파견했습니다. 1년 넘도록 이집트에서 전투를 벌였던 나폴레옹은 결국 영국에 패했고 본국과의 연락이 끊겨 혼자 탈출해 프랑스로 돌아왔습니다.
장군이 전쟁에서 패배했을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서 혼자 살아남아 고국으로 밀입국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나폴레옹은 큰 위기를 맞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총재정부에 불만을 가진 세력을 규합해서 군대를 만들어 파리에 입성합니다.
그는 총재정부의 지도자들을 감금하고 쿠데타를 통해 헌법을 개정한 후 스스로 통령이 되어 통령 정부를 열었습니다.
후에 그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고 프랑스혁명을 지지했던 나폴레옹은 나폴레옹 법전 등을 통해서 혁명의 이념을 정리했는데, 그가 유럽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자 혁명이념은 유럽에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부르주아
루이 14세는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층을 견제하기 위해 귀족을 더 늘릴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다가 부르주아들도 귀족이 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이때 많은 부르주아들이 귀족층이 됩니다. 귀족이 된 부르주아들은 특별한 면세 특권을 누렸습니다. 루이 15세 때는 수가 비약적으로 늘어난 귀족은 당시 전체 인구의 3% 이상이었습니다. 영국은 작위를 가진 귀족이 전체 인구의 0.1%였던 것에 불과한 것을 생각해보면 전체 인구수에 비례해볼 때 아주 많은 숫자였습니다.
이렇게 수가 많아진 귀족들은 루이 15세 때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수십 년간 자신들이 속해있던 부르주아 계급들이 더 이상 귀족층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부르주아의 신분이동을 막은 것입니다.
삼부회
특권계층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리며 실각하고 후임 재정 총감으로 돌아왔던 자크 네케르는 삼부회의 개최를 제안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에서 삼부회의가 열렸고 루이 16세는 귀족과 성직자들을 견제하기 위해서 부르주와 의원 수를 두 배 이상 늘렸습니다. 부르주아 계층은 머릿수가 더 다수였고 일반 성직자들은 시민계급의 이익에 공감하는 이유로 1인당 1 표제를 주장했습니다. 부르주아 의원들은 1인 1 표제와 영국식 의회 체제를 골자로 하는 개혁안을 내놨지만 문제는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이 거부하면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삼부회가 종료됩니다. 그 후 단독으로 국민의회라는 명칭으로 영국식 의회를 개최했습니다. 루이 16세는 부르주아 의원들의 이런 불법적인 행동을 제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폐쇄시켰습니다. 분노한 부르주아 의원들은 테니스코트에서 헌법제정까지 의회를 절대로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코트의 맹세까지 했습니다.
혁명 역사 상식은 내용은 마무리가 되고 몽골제국으로 이어갑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