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역사 상식 (유교,도교)

2020. 12. 6. 22:15상식 정보

종교 역사 상식 (유교, 도교)

안녕하세요 종교 역사상식의 유교와 도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유교

 한국인에게 유교는 아주 익숙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유교는 종교일까요? 부처에 의해 불교가 형성되던 시기에 중국은 500년이 넘는 춘추전국 분열의 시기였습니다. 혼란이 거듭되자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은 지배자가 세상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들을 쏟아냈습니다. 그들 중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 중 하나가 공구, 공자입니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 노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세상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의 바람직한 삶과 이상적인 정치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공자가 진단한 혼란의 원인은 춘추전국 시대 이전 왕조인 주나라 왕실의 '예'를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회복해야 질서가 바로 서는데 이를 위해 추구해야 할 것은 어진 마음인 '인'이었습니다.

 인은 우너래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천성으로 인간의 타고난 마음입니다. 인이 세상에 발현되기 위해서는 수양이 필요하고 수양의 목적은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백성은 백성답기 위함이었습니다.

 공자는 자신의 정책안을 받아들여 줄 군주를 찾기 쉽지는 않았지만 그를 따르는 많은 제자가 생겼고 하나의 학파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유가입니다. 그리고 유가가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시기는 약 400년 후인 한나라의 무제 때부터입니다. 유가에서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정치형태는 주나라의 봉건제로 지방분권적입니다. 언뜻 중앙으로 권력을 집중해 황제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지배자에게 유가는 적합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군주는 군주답게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신하와 백성은 군주에게 충성하며 백성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군주를 부모와 같이 여기라는 이론은 황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유익했습니다.

 특히 백성과 신하가 가져야 하는 충은 왕에게는 꼭 필요했습니다. 한 무제는 수도에 태학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유가의 경전을 가르쳤고, 이를 기준으로 관리를 선출했습니다. 이로써 유가는 하나의 학파가 아니라 정치적 통치 이념이 되었고 유교라고 불렸습니다. 그렇다는 유교는 종교일까 아닐까?  종교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인간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입니다.. 유교는 사후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은 없지만, 후손들이 해마다 죽은 조상들을 기억하며 제사를 지내는 등의 특정 절차는 강요합니다.

이를 통해 공동체의 사회적 관계를 강화하며 그 안에서 개개인의 삶의 의미를 찾게 하고 이를 추구하게 만듭니다. 죽음이 개인의 죽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내부에 속한 한 존재의 부재로 받아들이게 해 그 존재를 기리며 이를 통해 후손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안합니다. 죽음 자체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접근 방식과 시각이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정리하자면 신에 대한 초자연적인 해명이 따로 있지 않았으나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사회 집단 내에서 바람직한 삶의 의미와 방법을 제시하는 체계라는 면에서는 유교를 종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도교

 공자와 비슷한 시기에 조금 먼저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노자는 당시 혼란의 원인을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자신의 욕심을 타인이나 주변에 강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를 따라야 한다고 했는데, 도란 우주 만물의 생성과 소멸의 끊임없는 과정을 관장하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무위', 즉 인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국가나 사회, 인간도 우주의 한 부분으로 도의 우너 리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유지되고 소멸하므로 왕은 백성들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말 것을 제안했습니다. 전국 시대의 장자 역시 노자와 비슷한 주장을 했는데 이들의 사상을 노장사상이라고 합니다. 이들을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 도가가 성립되었습니다.

 진나라에 의해 통일된 중국은 한나라로 이어지다가 다시 분열의 위기를 겪습니다. 위진남북조 시기라고 불리는 이 분열의 시기에 도가를 바탕으로 도교라는 종교가 탄생했습니다. 노장사상에 여러 민간신앙이 융합된 종교로, 사후 세계보다는 현실을 중요시했습니다. 도교에서 추구하는 것은 불로장생이었습ㅂ니다.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신비한 주술의 힘을 빌리거나 심신을 수련했는데, 수련에 성공해 불사의 존재가 되면 그를 신선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에게 신선에 대한 개념은 매우 익숙합니다. 옛날이야기 중 착한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연못에 도끼를 바뜨리자 그 안에서 나와 금도끼와 은도끼를 준 할아버지가 신선입니다. 가끔 TV에서 자연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산속을 뛰어다니며 수련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도시의 인위적인 것에서 벗어나 자연의 삶을 추구하는 도교적 경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도가, 도교는 종교일까요? 사후 세계나 절대자인 신의 존재를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인간을 초월하는 자연의 이치를 믿으며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며 현실적인 욕구의 실현을 해결하려는 것으로 볼 때 종교의 범주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종교란 믿음과 제도

 사전에서는 종교를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으로 인간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체계'라고 정의합니다. 이 문장에서 2개의 단어를 눈여겨봐야 하는데, 먼저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합리적인 이성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믿는 마음입니다. 종교에서 믿음은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눈으로 본 적도 없고 이성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많은 것을 신의 뜻으로 믿고 무조건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제도'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도의 사전적 의미는 '관습이나 도덕, 법률 따위의 규범이나 사회구조의 체계'입니다. 사전에서 종교는 비제도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으로 구분된다고 정의하고 있지만 우리가 종교라고 인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종교들은 제도화된 것이 대부분입니다. 제도화되어 사회적으로 정착한 종교는 그 종교를 믿는 집단의 관습이나 도덕, 법률과 같은 규범으로 작용해서 집단을 유지하고 움직이는 강력한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즉 종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설명하고 이해될 수 없는 자연현상이나 어떤 초월적 존재에 대한 조건 없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데, 개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구성원들의 생활방식과 사회구조를 규정하며 믿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정신적인 큰 틀을 제공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을 가졌고, 사람을 움직이는 힘은 역사의 동력으로 작용합니다.

 

한국의 도교

 도교가 한국으로 넘어온 것은 삼국시대입니다. 삼국 모두 비슷한 시기에 전래되었으나 도교 신앙은 고구려에서만 성행했습니다. 지리적 여건도 이유이지만 정책적으로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수용을 권장했습니다. 그 이후 도교가 가장 성행했던 시기는 고려시대입니다. 불교가 중심 종교이기는 했지만 도교는 여러 민간신앙과 섞이면서 불교의 도참사상과 함께하여 그 풍습이 일반 백성 생활에도 뿌리를 내렸습니다.

국가적으로 호국 연기 행사가 크게 행해지기도 했으며 예종 때는 도교사원을 건립하는 등 도교를 불교보다 더 중시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도교는 그대로 이어졌습니다만 유학 선비들의 상소로 점차 위축되어 임진왜란 이후에는 도교의 모습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해방 이후에 중국의 도교의 하나의 파가 한국에 전래되었고, 국내에서도 도교 단체들 몇 개가 생겨 오늘날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중국계열의 도교는 중국식 의례와 교리에 치우쳐있고 한국에서 생겨난 도교 단체들은 불교, 유교, 민간신앙이 혼합된 교리에 유교식 의례가 주를 이룹니다. 궁중이나 민간에 퍼진 도교 풍습은 이어져왔고 노자, 장자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 함께 수련 도교에 종사하거나 도서를 주해 및 연구 저술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도교의 사상적 측면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국의 도교는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이후 크게는 의식 도교와 수련 도교의 두 가지의 맥을 이루면서 종교 사상뿐만 아니라 문학과 예술 등 한국의 생활 전반에 걸쳐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